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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

by b2winus 2020. 10. 6.

Premier deuil (El primer duelo) by William Adolphe BOUGUEREAU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도 다양한 패러디가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 상당히 왜곡된 해석이 많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이 이야기의 가장 대표적인 오류는 그들의 제물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쉽게 말해 가인이 하나님께 질 떨어지는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거절 당했다는 것이다.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 "땅에 떨어진 것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 나신 것 같다고 했다. 마냥 웃어 넘길 수 없는 것은 사실 어른들의 해석도 이것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려서 치성을 드렸는데, 가인은 그저 별볼일 없는 잡풀떼기 가져와서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이다", 놀랍게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설파하는 이러한 해석 속에 하나님은 토속 신앙에 등장하는 산신령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과연 그럴까? 땅의 소산 (4:3)을 바쳤기에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일까?

Lev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기서 소제의 예물은 "고운 가루" 즉 곡물 가루였다. 분명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곡물은 엄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중 하나이다. 더 나아가 제물의 퀄러티나 양 때문에 진노 하시는 하나님이란 해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레 5:7a)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레 5:11a)

레위기는 연이어 재정적인 상황으로 버거운 이들을 위해 어린 양을 바치지 못하면 비둘기 두 마리를, 비둘기 두 마리도 버거우면 고운 가루를 예물로 드릴 것을 명시한다. 즉 어린 앙이 되었든지, 비둘기 두 마리가 되었든지, 고운 가루가 되었든지 전혀 차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물을 받으셨다는 의미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좋으면 얼마나 좋고 부족하면 또 얼마나 부족하랴?

이러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치성을 드렸기 때문에 받으시고 가인의 곡물은 상대적으로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다.

혹자는 히브리서 11:4를 근거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것을 드렸다 주장한다.

Heb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과연 문자적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바쳤기에 의롭다 여기심 받은 것인가? 이 구절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서두에 있는 "믿음으로 (Πίστει)"이다. 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겠지만 더 나은 제사의 여부가 제물의 질이나 양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히브리서 저자의 해석은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이 제물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증거한다.

가인과 아벨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제물에 그 포인트를 둔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든지,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지만 가인은 첫 번째 소산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든지...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 없이 단어 하나 표현 하나만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주관적 해석이 난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전혀 성경 본문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만약 이야기의 핵심이 제물에 있었다면 그것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해야 할 것이 마땅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제물 자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모든 관심을 제물 그 자체에 쏟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제물만 번지르르하게 바치고 본질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제사를 종종 "가증하다 (תּוֹעֵבָה)"라고 말씀하셨다. (사 1:13) 우리가 그토록 정죄하는 우상숭배와 동성애와 같은 급의 표현이다. 미가 선지자는 그 유명한 구절에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보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외친다. (6:7-8)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본문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 (אֶל־הֶ֖בֶל וְאֶל־מִנְחָתֽוֹ)을 보셨고 가인과 그의 제물 (וְאֶל־קַ֥יִן וְאֶל־מִנְחָת֖וֹ)은 보지 않으셨다 기록한다. 본문에게 분명하게 대조되는 것은 그들의 제물이 아닌 아벨과 가인이다. 하나님께서 받고 받지 않으신 것의 중심에는 제물이 아닌 그 제물을 드린 이들이 있다. 이는 이어지는 이야기 내용과도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에 가득 찬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되물으신다. 하나님께서 받지 못할 것은 가인 그 자신이었고 이는 아벨을 살해한 그의 행동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초점을 맞춘 해석은 결국 "더 나은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잘못된 적용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십일조 안 하면 암에 걸린다"느니 "천원짜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느니 하는 속물주의 신학이 판을 치는 것이다. 성경 전체는 드려지는 제물의 액수나 규모보다도 그것을 드리는 자의 중심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두 렙돈 넣은 가난한 과부가 훨씬 더 많은 돈을 헌금한 부자들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막 12:43)

우리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 그 자체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제물은 매체이다. 제물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져 하나님께 그 향이 드려지고 남은 것들은 수입이 없는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모든 예배자들에게 주워져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고 즐거워 하는 잔치가 펼쳐지는 것이 제사 제도의 본질이다. 제물이라는 매체를 통해 드려지는 것은 우리 자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된 공동체이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근거로 "정성스러운 제물"을 논하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은 가난한 과부의 피를 빨아 화려한 성전을 짓고 자랑하던 그 바리새인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