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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

by b2winus 2020. 10. 29.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11-13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엘리야의 갈멜산 대첩 이후,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그가 만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 깊다. 특히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세미한 소리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 했을 당시 그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예상 밖의 반전에서 독자로 하여금 다채로운 신학적 해석과 적용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세미한 소리" 였을까?

먼저 이 세미한 소리에 대한 번역을 살펴보자.

  • KJV: a still small voice 잔잔하고 작은 목소리
  • NASB: a sound of a gentle blowing 온화한 바람소리
  • JPS: a soft murmuring sound 부드러운 웅얼거림
  • NRSV: the sound of sheer silence 정적
  • ESV: the sound of a low whisper 낮은 속삭임

이상 영어 번역본을 살펴보면 각자 이 "세미한 소리"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성경에 이 단어의 용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헬라어와 달리 구약 성경 외에 동시대 히브리어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한정된 단어 사용만 가지고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원어인 "דמם" 은 분명 "조용하다, 고요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같은 스펠링의 동음이의어(homonym)으로 "울부짖다, 통곡하다" 라는 뜻이 존재하기도 한다. 같은 셈어인 우가리트어 (dmm), 아카드어 (damāmum)에서도 같은 어근으로 "울부짖다, 통곡하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존재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도시 전체 또는 동물의 울부짖는 소리를 형용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은 기존의 "세미한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 두 가지 다 가능하다. 이사야 23:1-2에서도 같은 단어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그 의미를 고려해볼 수 있다.

Isa 23: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2절에 "잠잠하라"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דמם" 이다. 역시 "조용하다, 고요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문맥상 이해하기 어렵다. 1절에는 분명 "슬피 부르짖을지어다"라고 말하는 반면 왜 평행 구절인 2절에는 "잠잠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 단어를 "울부짖다, 통곡하다"라는 동음이의어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훨씬 더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레위기로 건너가 보자

Lev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대제사장 아론은 그의 아들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리 그 아들들이 잘못을 했고 불에 타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지라도 아버지가 된 자가 그 소식을 듣고 "잠잠하니"라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역시 "דמם" 이다. 과연 잠잠하다가 맞는 번역일까? 울부짖었다로 보는 것은 어떨까? 이 본문 가지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 자녀들의 불행 앞에 입술 깨물고 잠잠 했을까 싶다.

다시 열왕기상 본문으로 돌아와서

"좋아, 조용하고 고요한 소리가 최소한 울부짖음, 통곡하다로 번역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진 인정하겠는데 "세밀하다, 얇다, 부드럽다" 등으로 번역되는 형용사 דַקָּֽה 은 어쩔?"

맞다. 분명 דקק 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같은 어원으로 דקק 는 "부수다, 분쇄하다, 파괴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철저하게 부수고 분쇄하고 파괴된 것은 당연하겠지만 작고 가늘고 부드럽게 된다. 서로 관계 없어 보이는 이 의미들은 사실 같은 어근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단어를 "조용하다 고요하다" (דמם) 에 대한 형용이 아닌 소리에 대한 형용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작고 가늘고 부드러운 소리 대신 좀 더 투박한 부수고 분쇄하고 파괴하는 소리로 이해하면 어떨까? 다시 말해 "불 후에 울부짖고 부수는 굉음이 있는지라"

"세미한 소리"라면 뜻밖에 반전이 되겠지만 "울부짖고 부수는 굉음"이라면 구약에서 종종 묘사되는 여호와의 소리에 좀 더 걸맞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편 29:3-9

구약에서 묘사되는 여호와의 소리는 대다수의 경우 이처럼 천지가 진동하는 능력 있는 음성으로 묘사된다.

이사벨의 칼부림에 혼비백산하여 정줄 놓고 두려움에 떨며 굴 속에 숨어 지내던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부르셨던 그 "여호와의 소리"는 과연 어떤 소리였을까? 귀에 속삭이는 듯 세미한 소리? 아니면 울부짖고 부수는 듯이 능력 있는 소리? 해석의 여지는 분명 남아 있겠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건 확실한 듯 하다.

PS: 출처는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고든 휴겐버거 교수님의 아카드어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