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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히

매일성경: 요한복음 16:25-33

by b2winus 2017. 4. 5.

매일성경: 요한복음 16:25-33

  1. Inclusio
    16장은 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으로 시작해서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으로 끝마친다. 원어로는 같다. Ταῦτα λελάληκα ὑμῖν ἵνα... 이런 걸 좀 있어 보이게 말하면 "인클루시오" 라고 하고 수미상관이라고 하기도 하고 뭐... 그냥 핵심주제를 양끝에 두고 중간에 그걸 설명하는 샌드위치 구조라고 인터넷 검색하면 나온다. 쉽게 이야기 해서 16장의 핵심주제는 1절과 33절에서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1절에선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고" 33절에서는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실족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게 하려고 16장에 길게 설명하신거다.


  2. Scandalous

    왜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하셨을까? 그건 간단하게 반대로 말하자면 앞으로 닥칠 상황이 매우 실족 할만 하다는 것이다. 실족하다, σκανδαλίζω라는 단어에서 영어 "스캔들"이 탄생했다. 들어서 쇼킹한 것, 거슬리는 것, 넘어지는 것, 정신적 타격을 주는 것, 그것이 주님이 전하시는 제자가 마주할 실상이다. 사람들에게 출교 당하고 죽임 당하기까지 한다. 주님이 그들을 떠나실 것이란 것도 쇼킹한데 그 전에 제자들이 먼저 뿔뿔히 흩어지고 주님을 버린단다. 예수님의 사역은 철저하게 실패처럼 보일 것이고 세상이 기뻐할 때 우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다. 겁나 스캔더러스하다.

    근데 무슨 평안을 누리게 하신단 말인가?


  3. ἐν ἐμοὶ

    33절에 주님이 약속하신 평안은 주님 안에 있는 평안이다. 거기 기록된 "내 안에서"라는 표현을 검색해보면 바로 앞장인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무한 반복된다. 비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고 그를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더러 밖에 버려지고 불 태워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겐 무엇이든지 그의 이름으로 구하면 이뤄질 것이라는 약속이 반복해서 주어진다. (15:7, 16:23, 24). 따라서 주님의 이 약속이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 현실의 반전이 있을 것이란 미래의 약속. 근심이 기쁨 되리라는 Rain Check. 

    결국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대립이다.


    어느 쪽이 더 믿음이 갈까?

    아무리 생각해도 눈에 보이는 게 더 믿음직한 게 당연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에 내 믿음을 걸어서 환란 중에 평안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4.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33절은 재미있게도 다음과 같은 대칭구조를 가졌다.

    ἐν ἐμοὶ εἰρήνην ἔχητε 내 안에서 평안을 갖는다.

    ἐν τῷ κόσμῳ θλῖψιν ⸀ἔχετε 세상 안에서 환란을 갖는다.

    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세상 안에서는 그들이 환란을 당한다는 것이다. 양자택일이 아니다. 둘 다 엄연한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다. 어느 한쪽에만 눈 감을 수 없는 실제이다. 평안과 환란, 그 끝임없는 갈등의 연속에서 주님은 "담대하라" 라고 명령하신다. (2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 명령형이다... 사랑해요 어코던스!)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세상 안에서 환란이 더 커보이는데 어떻게 주님 안에 평안으로 그 환란을 잠잠케 할 수 있습니까?" 겁나 되묻고 싶어질 쯤에 날리시는 피날레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이다.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그 팩트 한방이 9회말 2아웃 상태의 나의 시궁창 같고 스캔더러스한 현실을 역전시킨다.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잃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하셨다는 그 사실이 내게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을 담대함을 준다.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헛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 (고전 15:13-19) 사도 바울이 외치는 것도 같은 이유 아닐까?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그 궁극적인 승리가 사실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예수를 떠나 뿔뿔히 흩어졌던 그 제자들이 죽음 앞에서 기쁨을 잃지 않고 순교의 삶을 기꺼이 받아 드렸을까? 무엇으로 우리는 사방에서 우겨싸는 것 같은 이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미래의 약속을 믿고 오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 그가 부활하셨기에 모든 것은 달라졌고 모든 것은 달라질 것이다.


    그것 하나가 어떤 절망 속에서도 담대히 내일을 살게 하는 나의 유일한 생명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