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oughts

그냥 끄적여 보는 "초대한국개신교 7대 논쟁" 후기

by b2winus 2017. 3. 9.
새물결플러스에서 개최한 옥성득 교수님의 강좌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초대한국개신교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실제적으로 진행되었던 논쟁들 7가지 (+ 2가지 더)를 다룬 내용이다. 7가지 논쟁은 다음과 같다.

1. 용어 문제, 1894-1901 Term Question
2. 처첩제 문제, 1894-1897 Polygamy Question
3. 제사 문제, 1895-1905 Ancestor Worship Question
4. 신문 문제, 1897 Newspaper Question
5. 병원 문제, 1900-04 Hospital Question
6. 교파 통합 문제, 1904-06 One Church Question
7. 대학 문제, 1905-1914 One College Question

말이 후기지 그냥 간략하게 내용 정리하고 내 생각 끄적일 것이니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시간 내서 무료강좌에 참석할 것이지 새물결플러스에서 이번에 출판한 옥성득 교수님의 책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25,000원)을 구입해서 읽어보시고 아니면 홈페이지에 계시될 동영상을 참고 하시라.


마포삼열 선교사님과 평양여자사경회


01. 요약

사실 뭔가 요약이란 걸 하게 되면 구체적인 FACT 전달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건 기록된 영상이나 책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된다. 라고 쓰고 자세히 다 적기엔 귀찮다고 말한다.

1. 용어 문제, 1894-1901 Term Question
한국에서 개신교가 전파 되었을 때 용어 문제는 크게 천주와 하느님 (하나님) 이 두 가지 사이에서의 갈등이었던 걸로 보인다. 가톨릭과 성공회 그리고 예상 외로 언더우드를 포함한 일부 보수진영 개신교 선교사들은 천주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그 외에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천주라는 새로운 용어 사용을 주장한 배경은 기존 한국 토종신앙의 하느님과 차별을 둔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반대로 하느님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하느님이란 용어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보다 친숙하고 과거 토속신앙의 신론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복음 전파에 있어 비교적 용이 했기 때문이라. 이 논쟁은 결국 보수진영 개신교에서 하느님(하나님)이란 단어를 수용 하면서 일단락 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시작 역시 하늘+님의 서울 표기로 그 기원은 모두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언더우드와 북미 선교사들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채택한 배경이다. 힐버트 선교사는 단군신화에서 환인은 성부, 환웅이 성령, 단군이 신인이라는 삼위일체적 유일신 사상이 이미 존재 하였다고 주장, 따라서 고대 한국에서 사용했던 하느님 (하나님)이란 용어 자체에는 이미 단일신론, 삼위일체적 신론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언더우드는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고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 지금 생각하면 이단이라고 말해도 할말 없을 단군신화 속의 삼위일체 찾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국 성도들 사이에서의 용어 상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고 복음 전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거지? 성공한 상황화의 예로 이해해야 하는건가?

2. 처첩제 문제, 1894-1897 Polygamy Question
처첩제 문제는 사실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성경에서도 주장하기 때문에 (비록 일부다처제를 따른 신앙의 선배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신학적으로 크게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부분에선 모두 일치 하였으나 이미 처 외에 첩을 둔 신자들의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에 대한 적용 부분에서 갈등이다. 이미 첩을 둔 신자의 경우는 이혼을 강요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믿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그냥 눈 감아줘야 하는 것인가? 결국 어느 논쟁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초대 한국교회가 찾은 해결 방안은 중도였다. 즉 신자로서 이혼을 강요하진 않되 첩을 둔 경우 집사나 장로 같은 교회 직분에서는 제한을 두는 형식을 따른 것이다.

  •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할 집사와 장로가 모범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해석과 의도는 좋은데 이런 형식이 과연 의도에 맞게 진행 되었을까? 심히 의문스럽다. 장로 목사가 되기 위해 첩과 자식들과 이혼하는 사례가 많지 않았을까? 그런 가정들은 어떤 시각으로 이런 해결방안을 이해 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3. 제사 문제, 1895-1905 Ancestor Worship Question
제사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중도를 취한다. 기존의 제사를 완전히 폐지 하자니 오랜 기간 동안 제사 문화에 길들여진 성도들이 이를 수용하고 따르는데 어려움이 많고 또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이 된다.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두고 성숙한 한국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결정하기 원했다. 해서 등장한 중도가 바로 감리교측에서 추천한 “추모회”라는 기존 기독교 문화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변형된 제사이다. 

  • 그 때 당시엔 오래된 제사 관습을 미처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추모회라는 대안을 내놓은 것이라면 왜 제사의 관습이 사회에서조차 많이 사라진 지금까지 추모회는 지속되고 그것도 가장 복음해석에 앞장서야 할 교회에서조차도 고인에 대한 추모회가 예배의 형식으로 열리는 것인지?


처음 세 가지 문제들이 선교지에서의 신학적 적용과 상황화의 문제 였다면 아래 네 가지 문제들은 현실적인 선교 방침에 대한 대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한 묶음으로 요약한다. 이 대립은 크게 서울 경기 지역을 기반으로 한 언더우드 선교사 세력과 평양과 그 외 다수 지역들을 기반으로 한 마페트 선교사 (마포 삼열) 세력의 갈등 구도로 진행이 된다. 두 세력의 신학적 해석과 선교적 입장을 염두하고 문제들을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신문 문제, 1897 Newspaper Question
이 갈등의 시작은 신문에서 부터 시작된다. 한국에 기독교 신문 발행을 앞두고 언더우드와 마페트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 것이다. 언더우드는 신문이라는 매체 자체는 문명/문화 (Civilization) 전달과 보조를 맞춰가며 기독교 문명을 보다 다양한 대중에게 소개해주는 용도로 사용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마페트는 기독교 신문은 주로 그리스도 (Christ)를 전하는 복음 전도의 도구로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이것은 단순히 양측의 개인적인 갈등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결국 기독교와 문화의 접근에 대한 양측의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사회 기관들을 통한 보다 광범위한 문화 전파를 꿈꾼 반면 마페트는 그러한 접근 방식은 결국 세속화에 젖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우려 속에서 기독교 지도자 양성을 보다 시급한 과제로 보았던 것이다.

5. 병원 문제, 1900-04 Hospital Question
병원 문제에서도 두 세력의 갈등은 지속된다. 언더우드측은 서울에 대형병원이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반면 마페트측은 1인 클리닉 형태의 지역 병원들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문제는 언더우드는 세브란스와 손을 잡고 서울에 세브란스 병원 설립으로, 마페트는 지역에 1인 클리닉 등을 유지하는 것으로 두 입장 다 동시에 공존하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6. 교파 통합 문제, 1904-06 One Church Question
교파 통합의 문제는 한국 성도들의 바램을 통해서 거의 실현되는 단계까지 갔었던 것으로 이야기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교단, 교파에서 파송 받았지만 선교지에서는 현지 교회 설립와 복음 전파가 가장 우선시 되는 일이었고 한국 성도들 또한 교파를 따르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른다는 입장 안에서 그 장벽을 뛰어 넘길 바랬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파 통합이 실현되기 되기 직전까지 갔으나 을사조약과 함께 일본의 등장으로 한국 선교에 큰 지각변동이 예측되었고 이에 각 교파에서는 파송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 보호 문제를 염려하여서 흐름은 교파 통합에서 각 교파 강화쪽으로 급선회 하게 된다. 결국 교파 통합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시도를 통해 성경, 찬송가, 기독교 신문의 통합을 이뤄냈고 교파들 간의 다양한 연합 사업을 추구하게 되었다.

7. 대학 문제, 1905-1914 One College Question
대학 문제는 양측 갈등의 정점을 찍었던 문제로 한국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인 서울에 기독교 가치를 지닌  사회 지도층을 양성할 하나의 종합적인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언더우드측의 입장과 그보다는 평양에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할 신학 대학을 세우길 바랬던 마페트측의 입장이 대립한다. 다른 문제들에 비해 그 중도적 해결점을 찾기 어려웠고 그 갈등의 골도 깊었기에 장기간에 걸쳐 많은 논쟁이 오고 갔던 문제 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8. 번역 문제
9. 귀신 추방 문제
  • 귀신 추방, 좀 더 크게 보자면 은사중지와 은지지속에 대한 초대한국교회 선교사들의 입장이 흥미롭다. 평양대부흥이라는 한국기독사에서 가장 큰 은사와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은사에 관해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마페트, 게일, 클라크, 길선주) 언더우드와 마페트의 경우 평양대부흥 당시 한국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은사에 관련하여 적극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수용한다던지 아니면 서술적으로 언급하는 정도로 지나친다. 왜 일까? 은사에 대한 입장이 모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번외편 같은 문제들이 존재했지만 더 상세한 내용은 귀차니즘에 건너뛴다.



02. 후기

7가지 문제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문제라고 생각했다.

1. 선교와 상황화의 문제

     먼저는 선교와 상황화의 문제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대상에게 어떻게 그 복음을 보다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갈등은 초대한국교회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은 역시 해석에 따라 다양한 것을 발견한다. 복음주의 진영 밖은 말할 것도 없고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도 보수적이었던 장로교 교파에서도 선교의 문제는 마냥 눈 가리고 원리원칙만 강요할 수 없는 문제였다. 최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보수 하면서 상황에 맞는 복음 전파와 실천을 위한 해석과 적용은 많은 시행 착오와 갈등을 불러 일으켰고 그 안에서 대부분의 경우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의 입장으로 일단락 지은 경우가 많다.
     이런 중도의 입장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최선책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최선책이 마침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초기한국교회 선교사들이나 지도자들 또한 그들의 결정이 더 나은 이상실현을 위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의 쉼표이지 마침표가 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성숙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스스로 자라감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리길 원했던 것이 선교사들의 바램이고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이전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최선책을 전통으로 받아드려 여전히 유지하려는 우리의 신학적 게으름은 참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배경과 문맥 속에서 신학적 적용의 문제를 어떻게 개선하고 개혁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이다. 아니면 그저 원리원칙만 늘어놓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고민들을 공론화 하고 그 사이에서 서로 논쟁하고 고민하고 그에 따른 최선책을 찾아가는 것이 초대한국 교회가 했던 일들이고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비교적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2.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

     다음으로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더우드와 마페트의 갈등과 대립의 근간에는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이야기 나오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리차드 니버의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유형인데, 문제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대한 설명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문화를 변혁시킨다는 이상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것인가?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이 전술에 따른 명령을 내리긴 쉬워도 그 전투를 실제로 싸우는 사람들에겐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복음 전파의 현장이다. 결국 목표는 복음으로 변혁시키는 문화라고 할지라도 그 시작점은 크게 복음과 문화가 보조를 맞춰가야 한다는 쪽과 문화보다는 복음을 우위에 두고 진행하는 쪽, 두 방향일 수 밖에 없다. 언더우드와 마페트의 갈등도 이런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양극단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아니었나 싶다.

     언더우드는 기독교 가치를 지닌 인재양성과 관련 기관들을 통해서 기독교 사회 구성을 보다 큰 스케일로 진행하고 싶어 했고 이에 반해 마페트는 그러한 접근은 기구주의 (institutionalization)와 그에 따른 세속화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 전망, 오히려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는 사실 결과론적인 이야기겠지만 마페트가 우려했던 대로 언더우드의 기구주의적 선교 접근은 후에 해당 기관들이 세속화의 길로 접어드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더우드가 한국 문화와 사회에 끼친 영향까지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이 맞는 것인지 이야기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 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서로 다른 시각에서 복음 전파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하고 서로 고민하며 서로가 서로를 다듬어 가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논쟁을 통해서 그 시대적 한계 속에 최선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체 마냥 원리원칙의 일들 만을 고수하는 일도, 시대의 흐름 만을 따른 체로 원리원칙도 없이 이리저리 흘러가는 일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래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갈등과 토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선한 것들을 이뤄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우리 기독교의 대처 방안이 과연 최선인가? 정말 공의와 긍휼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신 그리스도로 이 사회에 변혁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가? 최소한 초대한국교회가 보여줬던 수준은 유지해야 선교사님들 볼 면목이라도 있지 않을까? 더 성숙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퇴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싶다.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국내도서
저자 : 옥성득
출판 : 새물결플러스 2016.09.13
상세보기




SaveSave


SaveSave